
벼랑 끝의 소년과 기괴한 안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유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년 하반기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거장의 은퇴 번복 끝에 찾아온 가장 난해하면서도 은유적인 작품입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선명한 대중적 서사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마치 거대한 비밀 기호로 가득 찬 몽환집처럼 다가왔습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국내 관객들이 유독 이질감을 느꼈던 시대적 배경과 '새어머니(이모)'라는 가족 설정, 거장이 차용한 '새'라는 상징적 매개체, 그리고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며 덜 흥행했던 원인까지 3가지 핵심 관점으로 나누어 밀도 있는 리뷰로 살펴보겠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그늘과 '이모가 어머니가 되는' 한국적 정서의 충돌
영화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일본입니다. 주인공 마히토는 도쿄 공습으로 친어머니를 여의고,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함께 시골의 거대한 저택으로 이사합니다. 그곳에서 마히토를 맞이하는 인물은 죽은 어머니의 동생, 즉 친이모인 '나츠코'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임신한 나츠코를 새 아내로 맞아들였고, 마히토는 이모를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 낯선 상황에 직면합니다.
이 설정은 한국 관객들에게 상당한 심리적 거부감과 상충하는 정서를 유발합니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비극을 겪은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전쟁무기를 만들며 부를 축적하는 마히토 아버지의 모습이나 전쟁의 비극성을 일본 피해자 시선으로 묘사하는 듯한 초반부 분위기는 역사적 부채감과 불편함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더불어 '이모가 새어머니가 된다'는 구도는 유교적 정서와 현대적 가족관이 강하게 자리 잡은 한국 사회에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도덕적 난제입니다. 비록 과거 일본이나 일부 전근대적 문화권에서 혈통과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형사취수나 동서 관계의 재혼(취수혼 변형)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친엄마의 얼굴을 빼닮은 이모의 배 속에 남동생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어린 마히토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감정적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마히토가 이 비틀린 가족관계를 수용하고, 이 세계(탑 안)의 위험 속에서 나츠코를 "나츠코 어머니!"라고 외치며 구하러 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마음의 앙금을 털어내는 성장통으로 풀어냅니다. 즉, 타자였던 이모를 어머니로 받아들이는 행위 자체가 마히토가 비극적인 현실과 상처를 마침내 인정하고 품는 숭고한 화해의 과정인 것입니다.
왜 거장은 '새'를 택했는가: 펠리컨과 앵무새, 왜가리가 상징하는 모순된 인간군상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각적 요소는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다양한 '새'들입니다. 입을 벌리면 기괴한 인간의 얼굴이 드러나는 '왜가리', 굶주림에 못 이겨 어린 영혼(와라와라)을 잡아먹는 '펠리컨', 그리고 제복을 입고 군대처럼 집단 행동을 하며 왕을 모시는 '파스텔톤 앵무새'까지 등장합니다. 왜 하필 미야자키 하야오는 새라는 존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위협자로 설정했을까요?
새는 전통적으로 '이승과 저승, 현실과 이상을 오가는 전령'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새들은 아름답거나 신성하지 않고, 지극히 추악하고 모순적입니다. 왜가리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마히토를 도발하지만, 결국 마히토와 우정을 나누며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미증유의 동반자입니다. 이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흉측함과 진실함의 양면성을 뜻합니다.
또한, 와라와라를 잡아먹다 불에 타 죽어가는 늙은 펠리컨의 고백은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이 바다에는 물고기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영혼을 먹어야 했다"는 펠리컨의 변명은, 생존을 위해 타인을 짓밟아야만 했던 전쟁 당시의 민중이자 먹이사슬의 비극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으로 정갈하게 줄을 맞춰 무기를 들고 큰 입으로 뭐든 먹어 치우는 앵무새 군단은 파시즘과 군국主义,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힌 집단지성을 명백하게 비유합니다. 탑의 창조주인 큰할아버지가 구축한 순수한 '이상향(탑 안의 세계)'은 정작 앵무새라는 욕망의 군대에 의해 오염되고 파괴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새라는 동물을 통해 인간이 가진 야만성, 생존의 처절함, 그리고 폭력적인 군중심리를 비유하며, 마히토(미래 세대)에게 "이처럼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너는 과연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새라는 매개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친절했던 지브리의 배신? 대중적 흥행이 아쉬웠던 이유와 관점 포인트
국내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개봉 초기 지브리라는 브랜드 파워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으나, 최종 관객 수 약 200만 명을 기록하며 <너의 이름은.>이나 <스즈메의 문단속>이 보여준 500만 급 폭발력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값과 화려한 작화에 비해 흥행 화력이 일찍 감소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지브리 특유의 '친절한 서사 구조의 부재'와 '불친절한 자전적 은유' 때문입니다.
기존 지브리 영화들은 명확한 선악 구도나 명쾌한 모험의 목적(예: '하울'의 성을 찾아 떠나거나 '치히로'가 부모를 구하는 과정)이 존재했고, 오락적 카타르시스가 분명했습니다. 반면 이 작품은 마히토의 무의식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본인의 80년 인생사가 얽혀 있는 '의식의 흐름'에 가깝습니다. 줄거리의 개연성을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고, 인물들의 행동 동기가 대사보다는 상징과 미장센으로 처리되어 일반 관객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일제강점기 시대적 배경과 군수공장을 둘러싼 묘사, 이모와의 재혼 같은 요소들이 대중적인 진입장벽을 높였습니다. 마히토가 스스로 머리를 돌로 찍어 상처를 내는 자해 장면이나,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왜가리의 비주얼은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객층을 흡수하기에 부적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 포인트는 '거장의 솔직한 회고록'입니다. 큰할아버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자 지브리를 이끌어온 창작자이며, 그가 쌓아 올린 아름다운 아탑(아ニメ)의 세계는 이제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악으로 물들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라"라고 제안하지만, 마히토는 자신의 머리에 난 자해 흔적(내면의 악과 상처)을 인정하며 피비린내 나는 현실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완벽한 도피처인 환상의 세계 대신, 비록 모순과 전쟁이 도사릴지라도 진짜 현실을 살아가겠다는 선언. 영화는 감독이 평생 구축해 온 지브리 판타지의 세계를 스스로 붕괴시키며, 다음 세대에게 삶의 태도를 묻는 가장 장엄하고 솔직한 유언장인 셈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친절한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프레임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감독의 고백을 새겨들을 때, 비로소 잔상이 길게 남는 가슴 묵직한 명작입니다.